이 순례는 단순히 도시를 돌아보는 수준이 아니라 한 도시에서 생활할 집을 잡고 오랫동안 그 도시를 탐색하는 깊이를 갖는 수준이었다. 도시 탐색 후인 1909년, 22세의 나이로 다시 라 쇼 드 퐁(La Chaux de Fonde)으로 돌아온 르 코르뷔지에는 연합 아틀리에를 결성하고 아틀리에 건축을 계획했다.
오랜 여행 후에 만들어진 이 계획안은 그가 순례했던 피렌체 근교 가르초의 사르트르파 수도원에서의 감동에서 비롯됐다. 이렇듯 이 순례는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활동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그 영향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먼 훗날 르 코르뷔지에는 이 때의 도시순례에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술회할 만큼 그 체험은 그에게 엄청난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행, 특히 답사나 순례의 목적을 가지고 하는 여행은 중요한 체험의 기회인 것이다. 특히 건축가나 건축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답사는 필수과목이라 할만큼 그 중요성도 널리 인식되고 있다. 코르뷔지에의 젊은 시절 순례여행도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더욱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가 파리까지의 여행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행을 생활화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24세 되던 해인 1911년 동구의 여러 도시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그리고 아토스 산을 돌아본 동방순례는 아마도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보이지 않는 충격으로 사고의 깊이를 갖게 한다
이렇듯 건축의 순례나 답사여행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여행이 건축가에게 건축이나 도시, 또는 자연의 시각적 체험을 통해서 습득하게 하는 것 외에 눈에 드러나지 않는 충격으로, 그리고 사고의 깊이를 갖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연이나 도시, 그리고 건축의 표면에 노출되어져 시각적으로 나타나 이는 현상이나 피상적 요소들은 재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즉시 머리 속에 입력되어 금방이라도 다른 곳에 재현될 수 있다. 하지만 견문을 넓히려는 여행의 목적이 이렇게 단순히 눈에 비치는 현상과 사실의 확인이나 습득에 그칠 만큼 그 가치가 저급한 것이라면 굳이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 비용을 건축답사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건축에서 답사의 의미는 사실 외부로 드러나 있는 피상적인 것부터 습득하는 것을 배제하고 찾아야 한다. 외부로 드러난 일차적이고 시각적인 대상으로부터의 체험은 결국 건축의 본질을 얘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시와 인간과 건축의 관계설정도 불가능하게 하며 도시의 황폐화만 부채질할 따름이다.
테헤란로로 건축답사
서울의 테헤란로나 여의도 증권가에는 많은 고층 건물들이 군을 이루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경제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칠 지 몰라도 도시의 사람들 특히 건축가들의 마음 속에는 좋은 건축, 좋은 거리로 자리잡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이유일까? 도시적 컨텍스트 또는 도시구조를 무시하고 계획됐다든가, 인간을 생각하는 공간을 갖고 있지 못 하다든가, 가로 레벨에서의 시간적 · 공간적 공허함을 유발을 막지 못하고 있다든가, 어쨌든 이 곳의 건축이나 거리를 볼 때 이렇듯 중요한 여러 사항에 대해서 건축주나 설계자가 놓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욱 먼저 언급되고 반성되어야 할 내용은 이렇게 많은 건물들이 대개 건축주의 경제적 논리에 대한 적응과 시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피 디자인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디자인 내용 대부분이 타문화로부터 습득한 일차적이고 말초적인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길에서 보여지는 형태의 구성이나 입면의 요소 또는 디테일 구사에는 능숙함에 표출되어 있지만 그 건축 속에 당연히 존재해야 할 정신이나 혼이 깃들여져 있지 않은, 그래서 숨을 쉬지 않는 박제에 불과한 모습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테헤란로의 건물들과 건축답사가 무슨 관계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 테헤란도의 건축군에는 건축답사의 잘못된 의미가 어느 정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여기서 답사의 잘못된 의미가 이들 건축군의 표피 속에 숨어 있음을 굳이 얘기하려 함을, 도시 속의 너무나 많은 건축물들이 이러한 잘못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 사실 이것은 대부분 건축가의 잘못이지만, 건축주가 여행 속에서 얻은 건축물에 대한 경험이 건축계획에 깊이 작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이로 인해 우리의 도시는 점점 더 깊은 황폐화의 늪으로 빠지고 있어 그 늪에서의 탈출이 급선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건축답사의 진정한 의미가 다른 곳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건축답사의 의미를 찾아서
건축답사 또는 문화유산순례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를 찾는다면 우선 그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감동이다. 감동이란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원천에 의한 것으로 직접 대상을 접하지 않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설혹 간접적인 경험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직접 접한 체험에 비하면 그 깊이를 견줄 수 없다. 이 감동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이성적으로 대상의 어떤 내용이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든가, 작가 자신의 어떠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 작품 속에서 감동을 받았다든가 하는 이차적이고 상대적인 감정 이전에 그 대상물에 대한 무조건적 감동을 뜻한다.
이러한 감동은 보는 이에게 엄청난 충격의 결과를 초래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여행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원초적 감동에 의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가다오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때에 나란히 서서 같은 장면을 보았더라고 그 사람의 정신 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감동의 깊이는 차이를 갖게 된다. 어쩌면 이 감동은 지식의 상태와는 무관한 원시적 감성에 의한 것일는지 모른다. 건축에서도 그러하지만 우리는 종종 자연이나 타 장르의 예술을 접할 때에도 순간적으로 숨이 턱 멎는 듯한 감동을 얻지 않는가?
다음으로 두 번째 의미를 찾는다면 대상물에 대한 이성적 원인에 의한 감동이다. 이는 방문자의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는 대상물과 관련된 역사나 관련 인물의 얘기가 현장에서 대상물의 구체적 상황들과 결부됨으로써 그 대상물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느끼고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이차적 충격을 의미한다.
이 감동은 앞서 얘기한 일차적 감동과는 달리 방문자의 지적 수준이나 폭에 따라서 그 감동의 폭에 차이를 갖게 된다. 또한 이러한 감정은 대상물을 접하는 즉시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가운데 서서히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 또한 건축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다.
답사의 세 번째 의미는 문화체계 속에서 그 답사물을 통해 철학적 사상이나 사고의 깊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는 비슷한 유형의 대상물을 모아 이들을 통해 공통의 건축언어와 그렇지 않은 건축언어를 분류 · 비교함으로써 그 대상물이 만들어진 시기의 사회적 ·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 시기, 그 사회가 갖고 있던 자연관, 사회관 등 삶을 운영하고 사고의 체계와 깊이를 이해하고 그 대상물과 관련된 인문의 세계관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이나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이들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길잡이로 삼게 하는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건축답사 방법 세 가지
건축답사는 그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개의 지역을 선정해 그 지역 안에 위치한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것이 첫째이고,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적인 분류의 한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충실하도록 내용을 구성하여 탐구하는 것이 둘째이며,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특별한 테마를 선정하여 그 인물과 연관된 사실을 중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셋째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서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전준비가 미흡할 경우 건축답사로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한 분야에 대해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게 되므로 추구하려는 방향이 같은 동호인끼리의 여행이 가능하며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 미리 전문가를 동원한 공부가 가능하다. 반면 많은 시간과 여비를 투자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한 분야, 한 분야를 탐구해 나가는 끈기가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두 번째보다 더욱 상세한 내용이 요구되는 부분에 대한 집중탐구을 목적으로 할 때 유리하다. 특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향력이 큰 인물에 대한 내용이나 사건의 중심인물에 대한 집중탐구 등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보다 더욱더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경비가 요구된다.
건축가의 세계관과 건축관 구축을 위해
답사나 순례나 이를 통해 건축이나 문화유산의 표면에 나타난 건축적 공간의 우수성을 발견해 내거나 현대적 학문에 의해 이를 분석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일차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대상물 속에 숨겨진 사상이나 철학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더 깊은 답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이나 문화유산이 세워졌던 시기의 시대적 가치관을 찾아내고, 그 건축이나 문화유산을 통해 발견되는 건축가와 관련인물들의 세계관과 추출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답사에서 얻은 결과물을 자기의 작업에 즉각적으로 차용 또는 응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건축가 자신의 세계관이나 건축관을 구축하고 앞으로 건축창작을 해 나갈 수 있는 자양분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건축가 자신이 노력하는 일이다. 즉, 건축에서 답사나 문화유산의 순례의 의미는 건축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 자신의 구축에 있는 것이다.




